[사설] 이춘근의 한계

이춘근의 한계에 대해서 살펴본다. 이춘근의 한계점을 논하자면, 일반적으로 교수 출신이나 학자 출신 인사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될 수 있는 특징이면서도, 이춘근 개인적으로도 그 한계점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개별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춘근은 보수진영 내에서 그마다 국제문제, 또는 시사문제에 대해서 학문적 이론의 틀을 가지고 설명한다는데, (비교적으로 말해서) 그 존재의의가 적지 않다. 이른바 보수니, 우파니 하는 깃발을 내세우면서, 유튜브나 길거리에서 자기 목소리만 높이고, 그 근거제시가 척박하거나 그 세련도가 떨어지는 논객 또는 개인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춘근은 박사이면서 교수 출신답게, 그나마 체계화된 학문적 이론의 근거와 배경을 설명하기에, 적어도 그 점에서만큼은 다른 조잡한 인사들과는 차별화된 점이기도 하다. 소위 보수진영에 아무 내용도 없이, 목소리만 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무식한 사람들의 일반적 특징이, 자기가 무식한 줄 모른다는 점이다.

그런 이춘근이지만, 바로 그 점은 이춘근의 한계점과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춘근의 결정적 한계는 바로 학문적 이론의 근거 또는 체계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참으로 복잡다단하다. 글로벌 시대인 오늘날의 국제환경은 정말로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인종들,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고립된 채, 각자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학문적 이론의 가치는 우리가 그러한 복잡한 세상과 국제정세를 파악함에 있어서, 일정 정도의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관찰하는 어떠한 창(window)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과거의 수많은 출중한 학문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관찰과 고민을 간접적으로 흡수하는데 있어서, 학문적 수련과 연마의 과정만큼 그것을 집약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방법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도권 교육, 정형화된 학문과정의 코스는 단점도 적지 않지만은, 장점도 무척 크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학문적 후속세대에서 인류문명과 선배세대의 축적된 업적을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압축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문적 과정의 의미와 중요성은 그 무게감이 결코 작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과거에 일어난 현상이 반드시 오늘날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미래에 일어날 현상을 예측하는데, 항상 타당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의 이론이 오늘날의 사건을 설명하지 못할 수 있고, 미래에 일어날 현상에 대해 효용성이 없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사회과학이나 정치학 분야는 자연과학이나 기술분야와는 그 성격과 원리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정치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의 학문적 분야로서 성격도 그럴진데, 현실 정치나 현실의 국제정치는 대단히 변화무쌍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예측불가성이 항상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 개인들과 그들의 집합체인 사회 전체가, 합리적인 과학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이성과 감성의 조합’인 인간들의 세계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춘근의 글이나 논평, 분석을 일부라도 접해보면, 그 사람은 자기가 이때까지 접해온 분석의 틀, 이론의 틀에 ‘갖혀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이 정도로 얘기해서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감이 잘 안잡히고, 뜬구름 잡는 듯이 들리는 사람도 있다면, 후자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서,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하겠다. 역시 사례를 들어서 설명하는 방식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귀에 쏙 들어오는 설명방식일 수도 있다.

다른 대다수의 논객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이춘근의 결정적 한계가 노출되는 지점은 바로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났을 때이다. (당시 애국뉴스는 사전에 웹사이트 배너광고를 통해서 100% 정확하게 예측했고, 그것은 이후 입증되었다.)

이춘근이가 학문적 틀로써, 이런저런 잡다하고 한가한 얘기를 하고 말았지만, 결국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엉뚱한 얘기’였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만남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단어를 2가지만 꼽자면, 그것을 바로 ‘손자병법’과 ‘양아치’ 행태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손자병법과 양아치 전략의 결합에 관해서 설명한다.

김정은이는 실제 핵포기 의사가 전혀 없으면서, 트럼프를 거짓으로 유인해서 그 만남을 성사시켰다. 한반도(조선반도) 비핵화니, 뭐니, 어쩌니 해서, 사람들과 트럼프를 헷갈리게 또는 헛물켜게 만들어 놓고, 만남 자체의 열매를 자기가 취했다. 트럼프가 원하는 것, 즉 핵무기를 포기할 듯 하면서, 결국 그 약속 또는 실천은 하지 않은 것이다. 시쳇말로 트럼프가 ‘완전히 새 됐어’ 사건이다.

전통적 병법서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손자병법은, 그 한 구절에 나오길, 적을 그 이익으로 유인하라는 취지의 대목이 나온다. 즉, 트럼프가 오매불망하는 ‘비핵화’라는 이익으로 그를 싱가포르 회담장으로 유인한 것이다. 유인이라는 문맥에 담겨 있듯이, 김정은이는 애초부터 진심이 담겨있지 않는 거짓회담 전략이었다.

그러나 김정은이도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자신에게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 같은 트레이드 마크를 달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양아치’라는 점을 입증한 것이며, 만천하에, 온 세계에 알린 것이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알던, 모르던 상관없이 김정은이가 명확하게 본인의 의지하에 벌인 일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폭력조직 보스나 시정잡배들도 하기 힘든 ‘양아치’ 짓을 김정은이 하고 말았다는 점에서, 그 싱가포르 회담이 전혀 의미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양아치가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이춘근의 한계점으로 돌아오자. 김정은의 양아치짓을 그 무슨 학문적 이론의 틀이나 분석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양아치짓은 그냥 양아치짓인 것이다.

양아치의 행동을 학문적 틀이나 분석으로 설명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맞지 않는다. 그걸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문맥이나 격을 따지는 것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런 시도가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이다. 양아치짓에 대해 학문적 분석을 하는 것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이다.

이춘근의 결정적 한계는 바로 학문적 이론의 근거 또는 체계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세상과 국제사회에는 지금까지의 학문적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있다. 양아치도 그 중에 하나이다.

이상 이춘근의 한계점에 대해 살펴 보았다. (끝)

[애국뉴스 사설] 2020년 5월 19일

www.aeguknews.com

[관련 자료]

[사설] 폭스뉴스를 통해 미국 동향을 파악한다는 사람 (2019년 12월 2일)
https://www.aeguknews.com/?p=231